계속된 폭우로 다들 비 피해는 없으신가요? 이번 장마는 무탈하게 잘 넘어갔으면 좋겠네요.
저는 옥탑에 사는데 시끄러운 빗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답니다.
피할 수 없는 장마라면, 장마가 주는 몽롱함과 아련한 분위기에 취해보는 건 어떠신가요?
오늘은 비 오는 날 낭만에 젖어볼 수 있는 예술작품 몇 가지를 추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
대만 뉴웨이브 감독으로 잘 알려진 차이밍량 감독 작품은 참 불친절하고, 이해하기 어려워 별로 선호하지 않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중 <안녕 용문객잔>은 저의 인생 영화로 손꼽을 정도로 공감각적인 연출과 미학적 성취가 매우 뛰어난 영화입니다.
<안녕 용문객잔>은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곧 내일이면 문을 닫을 극장의 마지막 상영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사실, 내용이라고 한다면 이게 전부일 정도로 대단한 스토리 전개와 기승전결을 기대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 시적인 감상으로 온전히 영화가 주는 공간감과 정서를 느껴보시는 것이 이 영화를 대하는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소 느리고 긴 호흡이라 지루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처량하고 쓸쓸한 감정을 꾹꾹 눌러 담아 그 감정의 전달력이 무척 대단합니다.
영화를 텍스트로 잠시나마 느껴보시길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 몇 자 적어봅니다.
습하고 비 냄새 진득한 거리를 지나, 폭우를 뚫고 도착한 극장을 상상해 보세요.
느슨하게 늘어지면서 축축한 느낌이 어째서인지 기묘할 것입니다.
필름이 빛의 환영으로 바뀌고, 곧 문을 닫을 극장에서 그동안의 추억을 회상해 봅니다.
전해지지 못했던 마음, 하염없이 타들어 갔던 외로움, 씁쓸함, 상실감 등…
마지막 상영하는 영화가 끝나고, 몽롱하고 아련한 꿈결 같은 정서를 스크린 가득 느껴봅니다.
현실과 환상이 혼재하는 지금,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순간이 먹먹하고 애틋하기만 합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들에 아프고 아름다운 마지막 인사를 보내보세요.
이 영화는 극장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감독은 저물어가는 극장의 시대를 진혼곡으로써 먹먹하게 그려내지만…
저에게 이러한 변화는 씁쓸하기보다 새로 변화될 OTT의 시대에서도,
극장이 선물해 주었던 꿈과 희망은 여전히 저의 인생과 함께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서 저는 이 마지막 인사가 종언을 고하는 것보다는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 뭉클함 정도로만 간직하고 싶습니다.
2. Mansur Brown <Shiroi>
제가 비 오는 날이면 항상 찾게 되는 음악가 만수르 브라운입니다.
만수르 브라운은 런던 출신의 기타리스트로 소개해 드릴 <Shiroi>는 브라운의 데뷔앨범인데요.
퓨전재즈라고 해야할지 어떠한 장르에 가두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입니다.
음악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 개인적인 저의 감상을 나열해 보자면,
재즈의 그루브함에 몽환적인 이펙트가 얹혀져 음악에서 공간감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물에 젖은 듯 글로시한 질감에 소리와 소리 사이에 무언가 부풀어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빗방울이 대기를 부유하며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수면 위로 떨어질 때의 탄성, 리듬감을 음악으로 구현하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음악을 들으면, 저는 깊은 밤 비에 흠뻑 젖은 한적한 거리가 생각납니다.
습기 때문에 가로등 불빛과 전조등 불빛이 달무리 지듯이 둥글게 번질 때, 그 모호함과 일렁임이 느껴져요.
또 비로 온몸이 젖어 찝찝하기보다 오히려 상쾌함을 느끼고, 여름밤 비 냄새를 잔뜩 머금어 희미하나 선명한 공간감이 느껴집니다.
저는 시각적인 언어로 무언가를 전달하고 표현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존재하지 않는 소리로 특정한 순간을 잡아두는 음악을 듣게 되면 경외감이 들어요. 마술사 같다고나 할까요.
저는 여름밤 장마철의 분위기를 참 좋아하는 데 이러한 습한 계절감과 공간감을 너무나도 잘 표현한 음악이지 않을까 싶어 추천해 드립니다.
3. Saul Leiter
컬러사진으로 너무나도 유명한 사진작가인 사울레이터입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겠지만, 그는 아름다운 컬러를 포착하기 위해 눈, 비, 구름 등 다양한 기상 조건을 이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뉴욕의 거리와 일상적인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내는데 그는 직접적으로 대상을 노출시키기보다, 제 3자의 시각으로 어렴풋이 관조하며 대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인지 유리창과 차창을 통한 비 오는 날 거리의 모습이 더욱더 서정적이고 오묘하게 보이는데요.
빗방울이 맺힌 렌즈와 습기를 가득 머금은 듯 흐릿한 화면, 초점이 나간 듯한 사진 또한 더욱 감상에 젖게 만듭니다.
무언가 그 너머에 멈춘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레이터의 방식이 요즘 장마철 우산 너머로, 창 밖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상과도 닮아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은 레이터처럼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일상 속의 찰나를 사진으로 기록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 또한 오늘 비 오는 날 길을 걸으며 주변의 세계를 온전히 느껴보려 합니다.
이러한 평범한 일상도 하나의 프레임 안에 포착될 때 그 아름다움을 오래도록 간직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은 사진으로 찍을 가치가 있고 피사체 너머의 이야기가 존재하니까 말이죠.
오늘은 저도 사울레이터처럼 관찰자의 태도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이는 것 그 너머의 이야기를 포착해 볼까 하네요.
이렇게 비 오는 날 감성과 낭만을 돋우는 예술작품 3선을 소개해 봤습니다.
사실 자다 말고 새벽에 쓰는 글이라 저 혼자만 감성 과잉이 아닐까 싶지만, 추적추적 비 오는 날엔 더 센티멘탈해지는 게 사실이잖아요.
오늘만큼은 비 오는 날의 불쾌지수를 내려놓고, 몽롱하고 아련한 분위기를 더 느껴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럼 이만 글 줄이겠습니다. 좋은 아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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