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A. Visual

왕선정 작가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 날개가 부러진 새

PAHLO 2024. 6. 26. 11:11

왕선정 작가

 

지난주 금호미술관 <2024 금호영아티스트 2부>를 관람하고, 제 마음을 가장 압도했던 왕선정 작가의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 전시 후기를 남기고자 합니다. 

왕선정 작가의 전시는 지금 끝난 상태이지만, 앞으로의 왕선정 작가의 행보에 주목해 봐도 좋겠습니다. 

또한 이 전시 후기에는 최근 읽었던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과도 연상되는 지점이 몇 있어 함께 풀어나가 볼 생각입니다.

 


왕선정 작가의 그림을 본 첫인상은 뒤틀리고 왜곡되어 있는 인물과 그걸 표현하는 해체하고 분열되어 있는 방식에 상당히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형적으로는 공포와 두려움과 같은 강렬한 감정에 휩싸여 돌발적으로 그려낸 듯해 보이지만 그와 반대되는 밝은 색감과 경쾌한 터치가 양가적인 느낌을 주었는데요. 
실제로 왕선정 작가는 우리가 가진 두려움의 본질을 꿰둟어보고 점점 괴물처럼 커져가는 두려움에 직면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흔히 이러한 극단적이고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많은데요. 

하지만 왕선정 작가의 그림은 그림 속의 도상들과 이야기가 직관적으로 머릿속에 그려져 아트초심자인 저에게도 푼크툼으로 깊숙이 찌를 듯이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왕선정 작가는 매일 반복되는 끔찍한 악몽 속에서 생생하게 고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악몽이 자신의 도망칠 수 없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악몽을 그림으로 재구성하면서 두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한 결과 정반대의 긍정적인 경지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몇번을 발버둥쳐 날아올라 상처를 극복했다는 의미에서 전시 타이틀도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이지 않을까 싶어요. 


이러한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왕선정 작가의 그림에서는 마치 신화적 장면처럼 비극을 희극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요. 

그림을 감상했을 때도 전체적으로 기괴하기보다는 좀 더 키치한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것 역시 근원적인 두려움이 긍정적인 도약으로 전환되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일그러진 조형에 밝은 색감과 경쾌한 터치로 작가는 마냥 현재를 고통스럽게, 마냥 미래를 낙관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오롯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열쇠는 자신에게 있다는 듯 현재를 살아가는 굳건함과 강인함에서 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비단 작가의 개인적인 문제에 치부되는 것이 아닌, 저 또한 역시 그것을 직시하는 태도에 따라 상처를 초월할 수 있다는 용기의 메시지를 주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왕선정 작가의 그림을 분석해 보자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거나 새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난다라는 행위가 주는 통념에 따라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기도 하겠지요. 

하지만 곳곳에 제물로 바춰진 듯 누워있는 새는 날기 위한 새의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트라우마 속에서 자신을 옭아매는 과거 자신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비되는 누워있는 새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며 연약했던 과거에서 벗어날 힘은 현재의 내가 쥐고 있다는 자유의지의 긍지를 느끼게 합니다.

시점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웅크리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모습은 트라우마에 위축되어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이 끝끝내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실제 작가에게는 고통 속에서 일종의 구원이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이와 반대로 덩치가 큰 괴물이 무언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모습을 과장해서 표현한 모습도 보여지는데요. 

저는 이를 폭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을 좀먹게 하는 근원적인 두려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왕선정 작가 개인에게는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공중으로 날아오르면서 아래에 온갖 괴물들이 웅성이고 북적이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이 괴물들이 시야에서 작아지는 구도를 통해 고통에서 해방되어 상처에서 치유되는 모습을 나타낸 듯합니다. 

또한 캔버스 자체도 쪼개어 사용한 형식 역시 고통에 해체되어 있는 과거의 모습을 의미함과 동시에 과거와 분절되어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내포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봤습니다.

 


'새'와 '날다'라는 공통된 주제로 최근 읽었던 김혜순 시인의 <날개 환상통>과도 연상되는 지점이 몇 있었는데요. 

시집의 제목과 같이 환상통이란 신체 일부가 절단되었는데도 그 부위와 관련해서 체험하게 되는 감각을 뜻합니다. 

날개가 부러졌음에도 존재하지 않는 환각을 느낀다는 것은 참 씁쓸한데요. 

어떻게 보면 비극에서 체념하기보다 환각이 생존의 수단으로서 나름의 삶을 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지만. 

이러한 현실에 대한 도피는 순간만 모면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진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김혜순의 중 '바닥이 바닥이 아니야'의 일부 구절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바닥이 바닥이 아니야 - 김혜순 

발목에 묶인 은줄이 빛난다
엄마는 태어나자마자 나에게 새장을 입혔지만

발이 푹푹 빠지는 트램펄린 밤
흰 오로라처럼 사라지는 토끼 모양 그림자
트램펄린 밤 속으로 나는 튀어 오른다

누가언제왜어떻게어디서무엇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얼굴과 마주 보고 튀어 오른다
우리 엄마를 낳아서 소녀로 기르고
시집보내고 나를 낳게 하고
이제 할머니를 만들어서
병들어 눕게 한 달빛이 은줄 위에 빛난다
...

이 지구는 자전과 공전이라던데
내 치마처럼 훌러덩 돌기만 한다던데
왜 죽어? 왜 죽어?

온몸을 찌르는 잉크처럼 나를 적시는 달빛
이 빛을 다 베면 죽음이 멈출까

새장을 입은 채 나는 싸운다
저 숲과
저 산과
저 밤과

저들을 다 베면 우리 엄마가 살까?

 

 


이 시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을 해보자면, 아마 누구나 살다 보면 날개가 부러진 새처럼 갑작스러운 비극에 절망을 느낄 때도 있을 겁니다. 

한번 날개가 부러지면 새장에 갇힌 듯 발버둥 쳐도 쉽게 나아지지 않는 현실에 야속하기만 할 것입니다. 

밤 중에 고독히 토끼 모양 그림자를 보며 트램펄린에서 튀어 오르는 나날들. 좋습니다. 계속 도약하며 나 자신과 싸워야 하는 것 좋죠. 


그러나 날개가 상실됐는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날기 위해 애쓰는 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희망 고문일 때가 많습니다. 
날지 못해도 새는 새입니다. 날지 못해도 노래하며 춤추는 새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처절한 발버둥을 날갯짓이 아닌 두 다리로 구두 신고 검은 건반 흰 건반 노래하며 탭댄스를 춘다면 새로운 인생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을까요.


저는 왕선정 작가의 '나는 나는 법을 배웠다'처럼, 김혜순의 '날개 환상통'처럼 한 번쯤은 나는 것을 시도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낙관주의나 허황된 희망 고문보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를 받아들이고 현실의 조건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길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가 많이 밖으로 샌 것 같기도 하지만 왕선정 작가의 전시를 보면서, 김혜순의 시집을 읽으면서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고 있는 지금의 저에게 어떠한 깨달음을 준 것 같아 덧붙여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같은 날 관람했던 정영선 조경가의  전시 후기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합니다. 

소문으로 하도 좋다는 평이 많아서 방문했는데, 정말 대한민국에 내로라하는 곳마다 정영선 조경가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더군요. 

조경에 관해서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그 아름다움에 한번 놀라고 그분의 직업의식에 저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합니다. 

그럼 정영선 조경가로 다음 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