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에 다녀온 1박 2일 강릉 뚜벅이 여행 후기를 쓰고자 찾아왔습니다.
당시 저는 어딘가 마음이 답답하고 도무지 작업할 마음이 나지 않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는데요.
이대로는 또 하루를 버릴 것만 같아 갑작스럽게 강릉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어 당시를 회상하면서 지금의 저도 새로운 환기를 얻고자 기록 남겨봅니다.
당시 저는 어떠한 책과 영화, 음악도 좋은 자극제가 되어주지 못하고 무언가에 몰두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강릉 가는 버스에서 스포티파이가 추천해 준 mk.gee의 노래로 한껏 여행 가는 기분에 취할 수 있었는데요.
밤의 고속도로에서 듣는 mk.gee의 노래는 어둠 속에서 전조등 불빛이 일렁이는 듯 몽환적이었습니다.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께서도 mk.gee의 노래를 들으며 글을 읽어보시면, 당시 저의 감상에 젖으실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행 첫날은 솔을 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하도 평점이 엉망이라 기대는 하지 않았으나, 입장료가 아깝다는 생각이 든 전시는 처음이었습니다.
몇 작품 안되는 협소한 공간에 큐알코드에 있는 작품 설명 또한 너무 빈약했고 현대미술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떠한 감상도 느끼지 못할 것 같았어요.
루치오 폰타나와 곽인식의 작품의 찢거나 뚫는 기법에서 폰타나는 공간의 확장성을, 곽인식은 고유의 물질성을 표현했다고 하는데요.
두 사람의 공통된 표현 양식을 통해 다른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 새로웠으나 최초라는 것 이외에 작품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딱히 마음에 각인되는 작품은 없었고 전시 내용 또한 많이 아쉬웠던 걸로 기억합니다.



리처드 마이어의 설계사무소에서 건축했다던 미술관 시설 자체도 최근에 개관했다고 보기엔 정리가 안되어 상당히 어수선해 보였습니다.
온통 흰색뿐인 세상에서 라섹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돼 눈이 멀 것만 같았는데요. ㅜㅜ
소개 글에서 한국식 정원에서 영감을 받아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을 의도했다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특히 미술관에 들어가는 초입, 미술관 위에서 내려다보는 전경이 전혀 정비되지 않아 강릉 시내에 미술관만 덩그러니 놓인 듯 이질적인 느낌이 든 건 사실입니다.


다음 행선지는 오죽헌. 지난겨울에 퇴사하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 방문하고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던 곳이어서 다시 들리게 되었습니다.
봄꽃이 만발했으면 더 좋은 추억이겠지만 푸르른 새순과 몽우리 진 벚꽃이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 더 봄 타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가 오죽헌을 좋아하는 것은 초입의 정돈된 정원과 고즈넉한 한옥의 조화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또한 천장의 서까래와 접혀 올린 창호지 문, 그 사이에 있는 다다미방에서 아늑함과 평온함을 느꼈어요.


무엇보다 오죽헌 곳곳에 고목들이 자리 잡아 울창하게 뻗어있는 기세를 보고있으니 감탄에 차올랐습니다.
하늘을 향해 꼿꼿이 뻗어있는 나뭇가지를 볼 때 나도 흔들리지 말고 내 확실한 소신을 갖고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사실 강릉의 바다보다도 오죽헌에서 이런 마음의 울림을 얻고 싶어서 자꾸만 강릉을 찾게 됐을지 모릅니다. ㅋㅋ




강릉 선교장. 시내 변두리에 있는 오죽헌만 들리기엔 아쉬워 겸사 방문했던 한옥마을입니다.
문지방 너머의 한옥, 창을 통해 보이는 자연경관 등 프레임 안으로 보이는 네모 속 네모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예전에 어느 건축 유튜브에서 우리나라 서원에 가면 차경의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제가 바로 한옥마을에서 기대했던 것이 바로 이것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기억에 남는 건 땅의 경사에 따라 올라가고 내려가는 담장의 기와 자락이 멋있었습니다.
리드미컬한 동선으로 달라지는 한옥의 구성이 한치라도 지루할 틈 없이 아름다웠어요.
그리고 샛분홍빛의 매화가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한동안 잊히지 않더군요.

허기진 배를 달래러 강릉 시내로 재빨리 돌아가 명가네손칼국수에서 장칼국수를 먹었습니다.
장칼국수를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강릉까지 왔으면 정통 장칼국수를 먹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 방문했습니다.
장맛에 입이 텁텁할 수 있는데 깔끔하게 얼큰한 맛이었어요. 쫄깃한 면발과 푸짐한 해물 고명 덕에 7000원 그 이상의 맛있는 한 끼였습니다.

식사 후 수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 탓에 저도 물론이고 핸드폰도 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겸 테라로사에 방문했습니다.
커피는 전혀 모르는 문외한인데도 새로운 경험을 하고자 볼리비아 어쩌고 제일 비싼 핸드드립 커피를 주문했습니다.
핸드드립 커피 메뉴 설명이 다 상큼하고 향긋한 풍미의 원두라고 기재되어 있어서 행여나 제가 불호하는 인공적인 향이 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요.
그런데 은은한 과일 향이 입에 맴돌면서 적당한 산미에 커피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지는 게 처음 경험해 보는 목 넘김이었습니다.
유명하고 사람이 많이 찾는 데는 역시 이유가 있구나 하며... 그 매력적인 맛에 또 재방문하게 됩니다...ㅎㅎ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귀가 후 가족들에게 선물해 줄 기념품을 구매하기위해 소품샵 투어를 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도무지 제 취향이 아니어서 눈으로만 스쳐 지나가듯 보았고 오고 가는 길 로컬 느낌 낭낭한 주택가에 홀린 듯 걸어 다녔습니다.
저마다 알록달록 칠해진 주택들과 사람 사는 흔적이 가득한 소품들까지 저에겐 온 동네가 새로움의 연속이었는데요.
오밀조밀 모여있는 주택가를 걸어 다니다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저까지 괜스레 마음의 안식을 느꼈습니다. 아마 이 동네를 발견한 것이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자 소소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여행의 목적이었던 경포해수욕장에 가기로 합니다.
버스를 잘못 내려 경포해수욕장과 다소 거리가 있는 경포 벚꽃축제 행사장에 낙오되었는데요.ㅜㅜ
벚꽃이 아직 몽우리 진 상태라 축제가 다음 주로 연기되어 지역축제의 활기참은 찾아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오밀조밀 모여있는 노점 천막과 그 위로 불그스름한 저녁노을, 그리고 살갗에 닿는 서늘한 저녁 공기까지 어릴 적 야시장의 향수에 젖게 만들더군요.
놀러 온 기분이 나서 나름대로 좋았습니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도착한 경포해변은 참 아름다웠습니다.
먼저 모래사장에 한참을 앉아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며 그 아득함에 취해보았는데요.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은 언제나 봐도 말이 없고 고요하더군요.
저 수평선 너머의 세계에도 저와 같이 바다를 바라보며 내면에 침잠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뻥 뚫린 탁 트인 시야가 마음을 참 시원하게 해줍니다.
그동안 저의 번뇌를 다 알고 있다는 듯 항상 바다는 저를 너그럽게 감싸줘요.
자연은 순리와 이치에 따라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잖아요.
바다를 보면 얽힌 복잡한 고민도 생각보다 단순한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네요.


철썩이는 파도 소리와 함께 들어왔다 나가길 반복하는 물결을 보며, 저 또한 바다의 호흡에 맞춰 숨을 내쉬어보았는데요.
푹푹 빠지는 모래사장의 촉감에도 집중해 보고 곳곳에 박혀있는 조개껍데기도 만져보면서 온몸으로 바다를 느껴보려 노력했어요.
쉽게 볼 수 없는 바다인 만큼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최대한 오감으로 많이 느껴서 언제나 그 기억을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바다를 보며 즐거워하는 낯선 이들, 그 애틋한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들도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바다 앞에선 우리 모두가 감수성이 넘치고 자꾸만 서정적으로 되는 이유가 뭘까요?
다만, 일몰일 때 방문했으면 석양이 바다가 되어 붉게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쉽더라고요. 그때까지 기다릴지 고민도 했지만 배가 고픈 나머지 이만..ㅜㅜ.

마지막 행선지는 동화가든 원조 짬순입니다.
경포해변 근처에는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원조 짬순을 외치는 가게들이 상당히 많은데요.
원조를 남용할 수밖에 없는 레드 오션의 시장이지만, 그 굳건히 1위를 지키고 있는 동화가든입니다.
언제나 먹어도 몽글몽글하고 고소한 순두부의 식감과 얼큰하고 불맛 제대로인 짬뽕 국물은 저를 미치게 만듭니다. ㅜㅜ
뚜벅이만 아니었다면 몇그릇 포장해서 먹고 싶을 정도로 최고예요.



배불리 식사를 마치고 그 앞의 카페동화에서 순두부 젤라또의 부드럽고 꼬수운 맛으로 입가심을 해봅니다.
젤라또를 먹으며 바라보는 하늘에 노을이 눈부시게 아름답더군요.
붉은 해송들이 노을에 더 붉게 물들어 이 여행의 끝이 더욱 아름답게 기억될 것만 같아요.
여기서 1박 2일 강릉 뚜벅이 여행 후기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빡센 프로젝트로 두달가량 저를 몰아세우느라 마음이 아주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는데, 강릉 여행으로 완전히 재충전할 수 있었어요.
강릉 여행이 줬던 새로운 경험과 따뜻한 힐링은 한 계절이 지난 지금의 저한테도 충만한 에너지로 남아있네요. 회고하면서도 행복했습니다.
올여름은 구례/하동/남원을 방문했으니 다가올 가을에는 청주 여행을 가고 싶습니다.
다음 여행을 기약하며, 이만 글 줄이도록 할게요. 좋은 저녁 되세요! :)
'LIFE > L. Tra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례/하동/남원-3] 이야기가 있는 풍경 (삼성궁, 지리산허브밸리, 광한루) (29) | 2024.07.08 |
---|---|
[구례/하동/남원-2] 조용하고 호젓한 힐링 여행 (사성암, 운조루, 화개장터) (26) | 2024.07.04 |
[구례/하동/남원-1] 초여름 풍성한 녹음을 한가득 (화엄사, 천은사, 반야원) (23) | 2024.07.04 |